#1. 생장피드포르에 서서 모든 것을 내려놓다
2007년 5월13일 (일) : 파리 --> 생장피드포르
am 10:10 파리 몽파르나스 역에서 TGV를 타고 4시간 40분을 달려 바욘(Bayonne)에 도착
pm 13:00 다시 국철을 갈아타고 생장피드포르(St.Jean-Pied-De-Port)까지 1시간10분 남짓
파리에서 생장피드포르까지는, 밤기차까지 포함해서 하루 3번 정도 운행된다.
오후 4시쯤 도착해서 하루 자고 다음날 아침 일찍 출발하는 것이 가장 무난할 것 같아서 이렇게 계획했다.
한국을 출발해서 도쿄(JAL을 이용했기 때문에), 파리를 거쳐 다시 열차를 타고 바욘에서 생장피드포르에 도착하기까지
무척 먼 길을 돌아 드디어 나는 이 곳에 섰다.
바욘에서 국철을 갈아타면, 거의 80%이상이 순례자들이다. 백베커들의 세상이 시작된 것이다.
약간의 피곤함에 설렘과 기대, 두려움이 골고루 점철된 채 생장피드포르 속으로 들어섰다.
생장피드로프 역에 기차가 도착하면,
전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백베커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순례자들이 제일 먼저 찾아가야 할 곳은 카미노 순례자 협회
순례자 증명서를 발급받고, 베낭에 달고 다닐 가리비 조개껍질도 받는다
<산티아고 순례자협회> 사무실이 나타난다.
길을 몰라도 상관없다. 역에 내려서 배낭 멘 사람들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일찍 도착한 덕분에 기다리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국적과 이름, 여권 번호 등 간단한 서류를 작성하고, 순례자 증명서 (순례자용 여권 : 크레덴시알 Credencial)를 발급받는다.
발급 비용은 2유로.
첫 페이지에 생장피드포르의 상징, 순례자, 피레네 산맥 등이 새겨진 도장을 찍어주신다.
도장이 찍힌 순례자 증명서를 받고, 가리비 조개껍질을 골라 배낭에 달고 나니 그제서야 제법 실감이 난다.
숙소 배정을 기다리면서 사무실을 둘러보니 2006년 카미노 통계표가 붙어있다.
해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걸었는지, 국적별로 정리해 놓은 표다.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한국인 순례자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라고 하더니, 2006년엔 73명의 한국인이 이 길을 걸었다.
10여 년 전, 파울로 코엘료의 책 때문에 수많은 브라질 사람들이 이 길로 몰려들었다고 하는데,
작년과 올해는 김남희 씨의 책 때문에 한국인 순례자가 늘어난 게 아닌가 싶다.
도착한 날이 하필 일요일이라 마을은 쥐죽은 듯 고요하다.
모든 건물은 굳게 닫혀있고, 거리에 활력을 불어넣는 건 순례자들 뿐
순례자의 상징 - 배낭, 지팡이, 가리비 조개껍질, 그리고 낡은 등산화
협회 사무실에서 소개해 준 숙소
이 마을의 가장 끝 집인 55번지 알베르게
알베르게(Alberge)를 이용할 수 있다.
여러 사람들이 한 방에서 함께 자고 - 주로 2층 침대이며, 남녀 따로 혹은 남녀 공동일 때도 있다 -
취사 가능한 주방과 샤워실 등 간단한 부대시설이 갖춰줘 있는 저렴한 숙소다.
가격은 5유로 안팎.
공식 알베르게의 경우엔 숙박비 무료인 곳도 있다.
가격이 조금 더 비싼 사설 알베르게도 있는데, 비싼만큼 시설은 물론 공식 알베르게 보다 좀 낫다.
가난한 순례자들을 위한 소박한 숙소.
공동 생활이 불편하고, 여기에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것도 길 위에서 만나는 또다른 세계로 받아들인다.
단촐하고 소박한 숙소 내부 (개인 침낭은 필수)
건물 뒷뜰은 휴식처 및 빨래널이 마당
이곳에서 괜찮은 지도책(안내서)을 살 수 있을거라고 해서 한국에서 준비해 간 게 없었는데, 일요일이라 전멸이다.
어쩔 수 없지.
협회 사무실에서 준 A4짜리 알베르게 리스트랑 손으로 그린 피레네 산맥 등산로 지도만으로 일단 출발하는 수 밖에...
알베르게 앞에 있는 오래된 고성에 올랐다.
해가 워낙 길어서 밤이 쉬이 오지 않는다.
나는 왜 이 길을 걷는가?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종교적 신념이 뜨거워서도 아니고, 뭔가 대단한 일을 이루겠다는 의지 때문도 아니다.
여기 길이 있기에 걷는 것일 뿐, 그 길이 내게 어떤 의미가 될 지는 아직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단지 내가 서울을 떠나온 이유를 되짚어 볼 뿐이다.
일에 지치고, 사람에 치이고, 문득 내가 변해가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나는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단숨에 일을 때려치우고 도망치듯 서울을 떠나왔다.
나는 길 위에서 길을 느끼고 싶다.
그리고 나를 느끼고 싶다.
그래서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있을 지언정, 나는 지금 이곳에 나를 모두 내려놓는다.
그리고 아마 걸으면서도 내 속에 아직 쏟아내지 못한 그것들을 내려놓을 것이다.
'내려놓으라'는 한 마디만 새기고 이제 길을 가려한다.
그렇게 나의 카미노는 시작되었다...
이 길을 따라가면, 시간을 되돌릴 수 있을까...
이 길의 끝에는, 내가 찾아헤맨 내가 있을까...
길은 아무 말이 없다.
침묵 속에 그저 내가 가야 할 곳을 알려줄 뿐이다.
이 깜찍하고 앙증맞고 감각적인 디테일
마지막으로 생장피드포르를 눈에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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